아마 저는 아인슈타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세상 사람들과 생각이 다를 지라도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거든요. 물론 사람들의 냉소와 비난은 늘 두렵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당신이 옳다'라는 이야기만 들으려고 했다면,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목표는 틀리지 않는 것, 욕먹지 않는 것, 미움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진실에 가까이 서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말하게 두어라. 바람에도 꼭대기가 흔들리지 않는 탑처럼 굳건히 서라. 결국 과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는 이해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을 가다보면 명료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때가 되면 말이죠. 자신을 믿지 않는 무한한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외로운 길을 갈 힘을 얻으려면 무한한 오만함도 필요합니다. 길을 열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아인슈타인처럼, 과학자처럼, 카를로 로벨리처럼 되려면 사람들은 말하게 두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해야 하는 거죠. 물론 이건 외로운 길입니다. 로벨리의 말처럼 겸손함과 함께 오만함이 필요한 일이죠.
저는 길을 열고 싶었어요. 틀릴 수도 있고, 미움받을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리며 주장을 철회해야 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상처받은 채로 웅크리고 누워있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려면 이걸 인정해야겠더라고요.
나는 완전무결하지 않다.
이걸 인정하니까 내가 틀리는 게, 미움받는 게, 욕먹는 게 너무 당연하더라고요. 오히려 어느 누구도 완전무결할 수 없는데, 아무것도 틀리지 않는다는 게,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고요.
완벽한 OO주의자는
되고 싶지 않아요.
가수 요조는 비건을 지향하지만 완벽한 비건이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완전무결할 수 없죠. 옳은 행동만 하려고 하다 보면 내가 완전무결하다는 착각에 빠져요. 그러면 나와 다른 상대를 비난하게 됩니다.
반대로 나부터 완벽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거예요. 나는 틀릴 수 있다고 먼저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일단 저부터 남을 비난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본인이 틀렸다는 데 저를 더 비난할 수 없을 거예요. 대화가 가능해지는 거죠.
저는 그 어떤 신념도 100%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완벽해지고 싶지 않아요. 항상 옳고 싶지 않아요. 저는 언제든 기꺼이 틀릴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에 틀리는 게 두렵지 않아요. 두려울 게 없으니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완벽한 OO주의자가 되지 않는 게 삶의 목표예요. 채소를 좋아하지만 완벽한 비건이 되고 싶지 않고, 정리를 좋아하지만 완벽함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한 가지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복합적인 여러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완벽하려고 하면 삶이 너무 무거워지고, 무겁게 사는 사람은 무서워지거든요. 무서운 사람 곁에 사람이 남아있을 수는 없겠죠.
저는 애매함을 사랑하고 싶어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에 서 있는 것이 불안하고 외롭긴 하지만, 그 덕분에 다양한 세계를 오갈 수 있더라고요. 앞으로도 저는 이방인, 경계인으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게 목표예요.
이런 태도는 사실 인간의 본성에 반항하는 일이기도 해요. 인간은 확실함을 사랑하도록 진화했거든요. 인간은 사회적인 종이잖아요. 집단에서 퇴출당한 인간을 기다리는 건? 죽음이죠. 인간은 집단 안에 소속되기 위해 '확실히 여기 사람이 맞다'는 걸 쉼 없이 보여주며 살아갑니다. 그게 수만 년 넘게 우리에게 각인된 본능이니까요.
사람들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죠. (행동이 아니라 '말'을 하죠. 행동으로 보여주면 집단에서 퇴출당할 지도 모르니까 너무 무섭거든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건, 내 뺨을 때린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보는 일입니다. 그만큼 어려울 일이죠.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에서 주인공 애순이가 자신을 구박하고 심지어 뺨다구까지 때린 시어머니에게 '그걸 어떻게 잊겠냐'고 하면서도 곧이어 '근데 이미 퉁쳤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이 장면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을 했어요. 나로서 살아간다는 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요지경일 수밖에 없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시 요지경인 나 자신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거라고요.
"의사소통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고,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를 말하기 위해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죠. 우리는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뭔가 말할 것이 있다는 구실을 대는 것입니다."
<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다시 드라마 <폭싹 속았구다> 속 한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식구를 먹여 살리겠다고 TV는 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고서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던 관식이는, 딸 금명이와 말 한마디 섞고 싶어서 TV에 연예인이 나올 때마다 "쟤가 성유리냐."고 묻습니다. 거기에 대고 아니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대화하고 싶어서, 뭐라도 말할 구실이 필요해서 던진 질문인걸요.
결국 우리가 그토록 틀리지 않으려고, 욕먹지 않으려고,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저 '대화'하고 싶어서 아닐까요? 그렇다면 틀리더라도, 욕먹더라도 그냥 계속 말을 건네면 되는 거죠.
혹시... 눈치채셨나요? 이 글은 "좋은 댓글만 받고 싶어서 점점 더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워진" 제가 몇 달 동안 묵혀온 고민입니다. 부정적인 반응이 두려워서 점점 더 안전한 주제만 다루게 되고, 제 진짜 이야기는 숨기게 되더라고요. 이 고민을 일단락 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서 글로 정리합니다.
후! 이제야 시원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어요. 몸 사리지 않고 그냥 하려던 말을 하면서, 앞으로도 완벽하지 않게 기꺼이 틀리면서 제 이야기를 계속 해보겠습니다. 제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건, 그저 솔직한 '대화'였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