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만큼 했다.
회사 조직개편 결과가 나왔다. 원하던 곳으로의 이동이 가시화되고 있었지만 결국 임원진 인사의 변화로 내 이동도 최종 불발 되었다. 업계에서 더 유망한 포지션으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 졸인 무려 1년의 기다림이었다. 너무 아쉬웠고 앞으로의 커리어 계획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꽤 오랜시간 조직개편의 과정에 집중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스스로의 결정을 유보했다. 원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어쨌든 ‘상황’은 결론이 났고, 이제는 깔끔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내 ‘결정’의 순간이 왔다.
드디어 지리했던 상황이 끝이 났다.
당신을 끝을 낼 줄 아나요?
어른이 될수록 상황에 이끌리거나 갈팡질팡 결론을 내지 못할 때가 많아진다.
‘이만큼 했으면 됐다. 이제 끝내자’는 생각이 언제 찾아와야 하는지도 점점 모르겠다.
아닌 것 같아도 끝낼 용기가 없어서 질질 끄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끈기 있게 버텨내는 것도 중요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버텨내는 시간이 오래되면 점점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지고 궁극에는 스스로 갉아먹는 상황이 오기 시작한다.
버티는 상황이 나를 갉아먹기 전에 끝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 끝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할까?
무언가를 끝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왜 끝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까?’ 싶었는데 얼마 전 교양을 보다가 힌트를 얻었다.
끝낸다는 것은 결국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다. 그런데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 진화적 측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언가를 경계하지 않고 덮어놓고 시도하다가는 독버섯을 먹을 수도 있고, 위험한 야생동물에게 노출되는 등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DNA는 인간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의 변화이다. 요새 세상은 변화를 추구해야 생존에 유리하다. 아직 인간의 DNA가 세상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DNA의 결정 오류로 인해 우리는 무언가를 끝내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내가 불안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과 삶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느끼는 사람일 수 있다. 때문에 그만큼 DNA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힘을 써야 한다.
끝낼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1. 막연한 불안감을 정량화하기
변화가 절실한데도 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부분 그 두려움을 표현해 보라고 하면 생각보다 실체 없는 공포심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불안감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도 좋다. 불안감을 단어나 글로 표현해 보고, 내가 느끼는 만큼 정말 해결책이 없고 무서운 일인지 파악해 본다. 대부분의 일은 힘이 들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다 극복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제일 힘든 감정을 느낄 때는 늘 두려운 일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막상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해결에 집중했었다. 결국 ‘직전의 두려움’을 다스리면 되는 일이다.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
2. 기회비용을 인정하기
친구 모임에서 한 친구가 고민을 얘기했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성장 욕구도 채워지지 않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 다른 친구가 답을 했다. “손에 가진 것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뭐.” 대기업의 안정적인 수입과 인정받고 있는 상황 등 포기하기 어려운 조건들은 ‘끝내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잃을 것'과 '미래에 원하는 것'에 대한 정리가 끝난 후에는 결국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포기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인정하자. 삶이 계속 만족스럽지 않고 상황에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때로는 기회비용을 인정하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과감하게 놓을 수 있어야 한다.
3. 계획과 컨트롤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또 다른 친구는 타국에서 살고 있다. 그녀도 한국에서 안정적인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지만 삶이 너무 갑갑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결국 최소한의 준비만 마친 후 연고도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무려 300평 이상의 뷰티 서플라이 유통점을 운영하고 있다. 가게에서 고객을 관찰, 분석하며 얻은 인사이트로 그녀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새로운 꿈도 생겼다.
“어떻게 그렇게 결단력과 실행력이 좋아?”라고 물었을 때 그녀의 답은 간단했다.
“나는 결론이 꼭 이래야만 한다는 마음이 없어서 결정이 어렵지 않아.”
삶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다 컨트롤할 수 없다. 컨트롤에 강박이 생기면 삶에 틀을 만들어 버린 후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때로는 ‘난 어떤 상황에서도 잘 할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고 과감한 결정을 해보자.
내 틀을 부수면 언젠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기회가 생겨나지 않을까?
어떠한 결과에도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결국 끝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한다.
이건 좀 아니다 싶을 때는 맺음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