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쓴 나도 나니까
글 | 단단
나의 20대는 스스로를 지우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나를 지울수록 인정도 사랑도 오히려 멀어져 갔다. 서른넷, 네 번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면서 목표는 하나였다. 나다울 수 있는 곳,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곳. 오랜 방황 끝에 그런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거짓말이 나왔다. 주말에 무얼 할 거냐는 질문에 친구를 만나 놀 거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뉴스레터 콘텐츠 회의, 밑미 리추얼 미팅, 온라인 클래스 소개 페이지 작성으로 주말 일정이 꽉 차서 친구들과 약속을 잡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억지로 쓴 가면이 아니었다. 같이 일한 지 3개월이 된 우리 사이는 이 정도 거리면 충분했다. 그동안 이 자연스러운 거리 조절을 왜 가면이라고 불렀던 걸까? 어쩌면 그 가면은 스스로의 오랜 트라우마였을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나를 다 보여줬기 때문에 존중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면 속 민낯을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가면을 썼는데 오히려 그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인정받았을지도 모를 '나'를 감추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의 100%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둘러싼 상황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가면이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억압이 아닌 자유로운 조절 도구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사무실 출근을 했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서로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팀원들은 나에게서 정확함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렇다. 분명 내게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면이 있다. 동시에 쉽게 흥분하고 금방 좋아해 버리는 가벼운 모습도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절제된 무표정의 나만 알게 된 걸까?
가면을 쓰지 않기 위해 오히려 어색하게 힘을 꽉 주고 있었던 거다. 일부러 꾸며내지 않기 위해, 잘 보이지 않기 위해, 분위기를 띄우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차분하게 감정을 걷어내어 일하고 있었다.
혼자일 때의 내 모습만을 '진짜 나'로 규정해버렸다. 사람들과 함께일 때 밝고 경쾌하고 수다스러운 나를 '가면을 쓴 나'라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함께일 때조차 혼자일 때처럼 무표정을 짓고선 필요한 말만 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억눌렀다.
어린아이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한다. 상대를 버젓이 앞에 두고도 “못생겼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이 아이가 평생 가면을 쓰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럽고 당당한 사회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을 찔러대다가 결국 스스로도 찔러대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까?
가면은 서로를 위한 보호장비이자 스스로를 위한 갑옷이기도 하다. 당장 이해되지 않지만 상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서, 상대의 약점을 감춰주기 위해, 돕고 배려하기 위해,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이때의 가면은 스스로 선택해서 쓴 나만의 가면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를 가식적이라고 평가한다. 어릴 때는 그 말을 '내가 잘못되었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어색한 가면을 덕지덕지 썼다. 지금 돌아보면 그들은 나와 다른 거리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건 각자의 거리감이 아니라 그 거리감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그들이었다.
어떤 가면을 어떻게, 언제 쓸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이 내 것이 맞다면 그 가면 위에도 '나'는 드러난다. 성숙하고 단단하고 유연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